필자는 고등학생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갖다온 적이 있었다.
이리저리 버스를 타고 제주도 곳곳을 쏘다니면서 친구들은
"한라봉! 한라봉! 먹고싶다 한라봉!"
"오오오 저기 한라봉 판다!!"
하고 노래를 불러댔다.
2박 3일의 일정중 첫날.
대명콘도였던가?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제주도의 한 콘도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선생들은 나름 빠릿빠릿한 분위기로 새벽까지 잠을 안자고 복도 끝에서 칼눈을 뜨고있었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귤을 따먹을 음모를 꾸몄다.
먼저 탈출이 문제였다.
저놈의 선생들이 빡씨게 경비중인 상황에서, 도저히 정문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 한 친구녀석이 숙소 슈퍼마켓에서 술을 사다 걸려서 싸대기를 맞은 전적이 있어 분위기도 무거웠다.)
나는 복도로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쓱쓱 훑어보다가,
선생들이 긴장이 풀려 소파에 등 기대고 써니텐 마실 타이밍에 몰래몰래 나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 화장실 안에는 콘도의 각종 쓰레기를 처리하는 거대한 카트가 있었고,
그 안에는 적당한 두께와 적당한 길이의 로프가 있었다.
나는 그걸 3꾸러미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고,
친구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쳐다봤다.
로프 3꾸러미를 길게 펴서 엮어보니 3층은 거뜬할듯 싶었다.
장농 안에있는 철제 빔에다 로프를 단단히 묶고 창밖으로 던졌고,
친구들과 함께 역할 분담을 시작했다.
힘좀 센 두어명이 로프를 끌어당기는 역할을 했고,
몇몇 애들은 피로에 시달리면서도 휴대폰을 켜두고 잠자지 않고 대기하기로 했다.
난 로프를 타고 내려갈까~? 하다가 이거 원 두려움이 앞선다.
"고등학교 재학중인 이 모 학생 귤서리 하려다가 추락사"
이런 뉴스 나면 재미없지 않은가.
그때 나와 친구들은 제주도 와서 귤을 하나도 먹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억울하게 느껴졌고,
정말 한라봉을, 아니 일반 감귤이라도 먹어보고 싶은 소망이 굴뚝같았다.
혀튼, 나와 친구 종훈이는 창문으로 나가는건 포기하고 복도로 나갔다.
선생들은 복도 가운데의 중앙 계단만 관리하느라 늘어져있는 상태였고,
그들이 끼리끼리 모여 새우깡과 써니텐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걸 보고 복도 끝단의 비상 출구로 나가는데 성공했다.
후우...
배낭을 끈으로 꽉 조여 등에 완전 밀착되게 하고,
콘도 뒤 주차장에서 3층에서 내려다보는 친구들과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건승을 기원했다.
우리는 정말 귤이 먹고싶었다.
콘도 앞으로 나가 정문을 통과해 찻길이 있는 오솔길로 나가야 하는데,
이거 영 만만치가 않다.
교통량도 꽤 되고, 선생들이 중앙에 있는 식당에 모여있어서,
그냥 걸어나가면 대번에 눈에 띄일게 뻔하다.
나와 종훈이는 콘도 옆을 따라 쭈욱 늘어선 낮은 화단을 이용하기로 하고,
낮은 포복 자세로 화단의 초목 높이에 맞추어 이를 악물고 조곤조곤 기어가
옆을 지나다니는 차량에게 노출되지 않는데 성공.
그리고 식당 창문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두번째 단계로 나가는데 성공.
다음은 정문 돌파인데, 이건 아예 노골적으로 감시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
그때 마침 우리가 있는곳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봉고차가 다가왔고,
우리와 감시자의 사이에 봉고차가 위치하는 순간 우리는 어둠속에서 봉고차와 평행선을 이루며 달렸다.
그들은 봉고차에 가려 우리를 보지 못했고, 우리는 달리다가 곧바로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봉고차 기사가 우리를 발견하면 역시 재미없기 때문이다.
정문을 돌파하고 이제는 행군 시작이다.
구비구비 내려가는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다가, 차가 다가오면 엎드리고,
차가 지나가면 일어서 걸어가기를 한동안 반복했다.
버스로 올때는 몰랐는데, 걸어가니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한참을 걸어간 끝에 귤 농장에 도달했는데, 농장에서 키우는 개들때문에 비잉 돌아가 취약한 지점을 공략했다.
오호 ~ 지져스!
가을하늘 별처럼 어둠속에 귤이 천지에 널려있다.
나와 종훈이는 티 안나게 골고루 귤을 따다가 배낭에 넣기 시작했고,
휴대폰 불빛으로 비춰가며 귤을 따니 곧 배낭은 두둑해졌다.
무사히 주차장으로 돌아와 핸드폰으로 신호를 보내니 한놈이 창문을 열고 로프를 던져준다.
로프에 배낭을 묶고 창문으로 끙끙거리며 끌어올려 무사히 전달 성공.
배고픔에 시달리는 전사 20여명에게 성공적인 보급작전을 완수한 나와 종훈이는 방안으로 무사히 들어왔고, 작전을 종료했다.
아놔.. 우리가 나갈때만 해도 다들 죽은듯이 자고있었는데, 귤 왔다는 소리만 듣고 애들이 귀신처럼 일어난다.
어찌 옆방에서도 알았는지 우르르 몰려든다.
배낭에 꽉 찼던 귤들이 순식간에 비워졌는데,
방안의 애들이 다들 일어나 허겁지겁 귤을 까먹는 장면은 가관이었다.
비록 한라봉은 아니었고 덜익어서 시큼하긴 했지만 그 맛이 어디 가나.
당시에는 긴장감 넘치는 실전 군사작전 방불케 하는 거사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단순히 또라이짓일뿐.ㅎ
그저 지금 생각하면 귤농장 주인에게 미안할뿐이다. ㅠㅠ
자! 올해도 동생과 함께 손이 노랗게 되도록 귤을 까먹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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